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 간섭기 (문단 편집) === 응방의 폐해와 기타 여러 진상의 폐해들 === 그 밖에 원나라가 요구해올 때마다 개, 말, 쇠고기, 인삼, 진주, 백조(白鳥, 고니), 매(鷹), 은(銀), 여의주 등 막대한 양의 특산품을 수시로 바쳐야만 했다. 특히나 부족한 수량은 민간에서 약탈하듯이 징발하여 그 폐해가 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원나라에 [[매(조류)|매]]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응방(鷹坊)[* 원나라가 요구하는 매의 포획과 사육을 위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두었던 관청]의 폐해가 가장 심각하였다. >병신일. 왕이 명령을 내리기를,“응방(鷹坊)에 속한 백성 205호(戶) 중에서 102호를 없애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당시에 모든 백성들이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렸기 때문에 다투어 응방 소속으로 들어가버린 자들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205호라 한 것은 거짓이고 102호를 없앤다는 것도 9마리 소에서 털 한 가닥을 뽑는 것과 같을 뿐이었다.''' 응방에서는 오히려 은(銀)·모시(紵布)·가죽·베를 그 사람들로부터 거둬들여 사사로이 나누어 가졌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매(鷹)를 먹이는 것이 고기가 아니고 은과 베가 매의 배에 가득하다.”라고 하였다. > >ㅡ 충렬왕 3년(1277), 7월 ㅡ 그러나 응방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충렬왕의 노력은 친원파의 반대에 부딪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원나라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였다. >대장군 인후(印侯)와 장군 고천백(高天伯)이 타나(塔納)와 함께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타나가 절령참(岊嶺站)[*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당도하자 옹진현(甕津縣)[*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인천광역시)|옹진군]]] 등 여러 현에서 점심을 대접했는데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타나에게, '''"우리 고을 백성들은 모조리 응방(鷹坊)에 예속되었으니 가난한 백성들이 무엇으로 국가의 비용을 감당하겠습니까?''' 차라리 주기(朱記)를 나라에 반납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이를 들은 타나가 개경(開京)에 도착해 재상더러 이렇게 질책했다. "동방의 백성은 천자의 적자가 아니오? 백성들의 고통이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구휼하지 않았으니 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문책하면 무슨 말로 변명할 것이오?" '''이에 재상들이 왕에게 응방의 폐해를 없애야한다고 건의했더니 왕이 노하여 황제의 신임을 받는 회회(回回, [[위구르]]) 사람을 요청하여, 그로 하여금 여러 도의 응방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여 재상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조인규(趙仁規)[* 고려시대 [[권문세족]] 중 한명으로, [[충렬왕]]의 몽골인 아내 [[제국대장공주]]와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성장을 이루었다.]가 극력 간쟁하고 [[제국대장공주|공주]]도 또한 반대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결국 중지되었다.''' > >ㅡ 충렬왕 6년(1280년), 3월 ㅡ 아래는 고려가 당대에 원에 매를 바친 기록들이다. {{{#!folding 【《목록》】 >[[http://db.history.go.kr/id/kr_025r_0050_0030_0040|1262년 9월 기록]] > >[[http://db.history.go.kr/id/kr_025r_0060_0040_0030|1263년 5월 기록]] > >[[http://db.history.go.kr/id/kr_028r_0030_0060_0030|1275년 6월 기록]] > >[[http://db.history.go.kr/id/kr_028r_0040_0070_0020|1276년 6월 기록]] > >[[http://db.history.go.kr/id/kr_029r_0040_0050_0070|1282년 5월 기록]] > >[[http://db.history.go.kr/id/kr_029r_0040_0090_0080|1282년 9월 기록]] > >[[http://db.history.go.kr/id/kr_029r_0050_0070_0060|1283년 7월 기록]] > >[[http://db.history.go.kr/id/kr_030r_0010_0060_0020|1285년 6월 기록]] > >[[http://db.history.go.kr/id/kr_030r_0010_0070_0010|1285년 7월 기록]] > >[[http://db.history.go.kr/id/kr_030r_0020_0060_0020|1286년 6월 기록]] > >[[http://db.history.go.kr/id/kr_030r_0040_0120_0030|1288년 12월 기록]] > >[[http://db.history.go.kr/id/kr_030r_0050_0060_0010|1289년 6월 기록]]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또한 원은 당시 고려에서 구하기 힘든 진상품들을 요구하여 고려를 힘들게 하기도 하였다. >몽고(蒙古)에서 필도적(必闍赤, 비칙치) 흑구(黑狗)와 이추(李樞) 등 7인을 보내 궁실(宮室)을 지을 재목을 요구하였으며, 또 중서성(中書省)에서 공문을 보내 금칠(金漆)·청등(靑藤)·팔랑충(八郞虫)·비자나무(榧木)·노태목(奴台木)·오매(烏梅)·화리(華梨)·등석(藤席) 등 물품을 요구하였다. > >왕이 중서성(中書省)에 회보하기를, “'''이번 중서성의 공문을 받아보니 ‘고려는 아직 평온하지 못하므로 황제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올해의 조공하는 폐백은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금칠은 소용되는 데가 많으므로 이제 필도적을 파견하여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 축적한 금칠은 육지로 나올 때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또 그 산지는 남쪽 지방의 섬인데, 요사이 역적이 왕래하는 곳이어서 기회를 보아 사람을 보내 채취하여 바치겠습니다. 우선 현재 남아있는 10항아리 분을 보내고, 옻칠액을 만드는 장인은 그 산지에서 징발하여 보내겠습니다.''' 또 흑구가 말하는 비자나무는 지역민들이 백목(白木)이라 부르는 것인데, 이추에게 그 산지를 물으니 승천부(昇天府)의 금요도(今要島)라고 하였습니다. 청등과 팔랑충도 역시 이 섬에서 난다고 하고 또 진도(珍島)와 남해(南海) 등지에서도 난다고 하며, 비자나무 열매와 동백 열매(冬栢實)도 또한 거기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 >그러나 그 지역은 개경(王京)에서 1,000여 리가 넘기 때문에 바로 보내기가 어렵고, 이추가 가보지도 않고 되돌아 왔기에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과 함께 각기 사람을 파견하여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라고 하였으니, 그들이 돌아오면 구체적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우선 거두어들인 무늬 있는 비자나무 몇 조각을 보내며, '''팔랑충은 이추가 처음에는 교동군(喬桐郡)에서 난다고 하기에 사람을 보내 채취하게 하였으나 없고''', 또 금요도에서 난다고 하므로 다시 사람을 보내 조사할 예정입니다. 노태목·해죽(海竹)·동백(冬栢)·대자리(竹簟)는 현재 보유분을 모두 보내고, '''오매·화리·등석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닌데 예전에 송나라 상선에서 얻은 것이 약간 있어서 아울러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 >ㅡ 원종 12년(1271), 6월 ㅡ 아래는 그에 대한 기록들이다. {{{#!folding 【《목록》】 >황후가 일찍이 낙산사(洛山寺)의 여의주(如意珠) 보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송분으로 하여금 그것을 진헌하도록 하였다. >ㅡ 1273년 3월 ㅡ > >원(元)에서 임유간(林惟幹)과 회회인(回回人) 아실미리아(阿室迷里兒, 아시미리르)를 보내어 탐라(耽羅, 제주도)에서 진주를 채취하였다. 임유간(林惟幹)이 탐라(耽羅)에서 진주를 얻지 못하자 민(民)들이 소장하고 있던 100여 개를 취하여 원(元)으로 돌아갔다. >ㅡ 1276년 6월 ㅡ > >좌랑(佐郞) 이행검(李行儉)을 원(元)에 보내어 황칠(黃漆)을 진상하였다. >ㅡ 1282년 4월 ㅡ > >낭장(郎將) 백견(白堅)을 원(元)으로 보내 고니 고기를 바쳤다. 고니는 하양(河陽)[* [[경상북도]] [[경산시]]]과 영주(永州)[* 경상북도 [[영천군]]] 땅에서 많이 나는데,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잡게 하였으므로 그 일대가 전부 소란스러웠으며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였다. >ㅡ 1294년 12월 ㅡ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